전시기간 | 2008-01-11 ~ 2008-04-27 |
장소 | 시안미술관 전관 |
주최 | 시안미술관 |
주관 | 시안미술관 |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상북도, 영천시, 한국박물관협회, 한국사립미술관협회 |
작가 | 노상동, 배동환, 안종대, 안종연, 이이남, 이헌정 |
담당 | 김현민 |
너에게 바투 서서 - Close To You
너에게 바투 서서
강선학 (미술평론가)
작품은 작가의 얼굴이라고 한다. 작품이 작가를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은 작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타자로 작가와 마주 서 있는 존재 아닌가. 그러면 전시는 작품의 얼굴일까, 몸일까, 아니면 작가의 얼굴이거나 몸일까.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세계와 양식적 특징을 가진 작가들이 모여 한 전시를 이루는 이 전시는 어떤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한 개념에 줄서기를 한 듯 한 전시에서는 방정한 명료함이 있지만 언제나 기획자의 보이지 않는 입김 혹은 시선이 부담스럽다. 때로는 작가의 얼굴보다 기획자의 얼굴이 먼저 나선다. 그렇다고 개념 없는 작가들의 집합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전문기획자의 얼굴을 피하려는 이들 의도는 새로운 전시 형태를 선택 했지만 낡은 외투 속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할 문제들의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나 아닌 다른 것들, 이 세상 모두는 삼인칭이다. 그런데 너는 삼인칭이 아니고 이인칭이다. 삼인칭의 영역에서 좀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와 구체화된 대상. 피할 수 없이 당면한 만남이 타자인 바로 너이다. 나는 때로 이인칭의 필연성이 있다면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고 자문한다. 작가에게서 작품과 전시는 이인칭의 밀착된 타자이다.
삼인칭의 그 막연함에서 이제 내 앞에 실재하는 것으로 다가서 있는 세계, 삼인칭이 아니라 이인칭이 된 삼인칭이다. 비로소 내 시선과 호흡으로 다가선 타자이다. 결코 나일 수 없지만 너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부재의 내가 이인칭 너인 것이다.
내 앞에 바투 선 타자, 너에게 바투 서서 나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내 호흡에 따라 변하는 네 모습은 나일까 너일까. 아니,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나이며 너이다. 나에게 바투 선 세계를 통해 비로소 나는 나임을 알 수 있고, 타자로서 나를 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 지금이라는 현재형으로 언제나 바투 서 있는 것이야말로 작품이자 전시이다.
작품이란 언제나 전시라는 형태로 드러나고 전시는 언제나 현재 여기에서 보여지고 존재한다는 면에서 작가자신이자 타자인 셈이다. 전시는 지금 여기서 작품을 묻는 타자의 시선이다. "현재는 존재의 이해가 열리는, 모든 존재 사태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시간성을 가리킨다. 하나의 존재자가 존재하기 시작하고, 존재자의 존재가 현존의 지평 위에서 사유되는 것은 현재를 통해서, 즉 현재에서부터이다.“ 작품에 다가서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가서는 짓이다. 자신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미는 짓이며, 그 얼굴을 들이다보는 짓이다. 그러나 "얼굴은 동일자로 축소될 수 없는 타자가 드러나는 모습”임도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전시로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이 이 전시의 당위성에 대한 답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얼굴은 모든 질문에 선행하는 질문이전의 질문이다."라고 했듯이 나와 타자, 작품과 전시는 질문으로서 여기 있다.
타자에게 다가서서 그 타자가 내 자신일 때, 그 대립의 순간이야말로 일치의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자아의 명료화이자 타자의 명료화가 아닌가. 세계라는 다의성에 발을 딛는 순간인 것이다.
"촌각의 삶 속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이 천의 얼굴을 가진 괴이한 시간의 신비"야말로 타자의 얼굴이자 자아의 얼굴이 아닌가. 나이면서 나 아닌 것들의 대면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하나의 전시 역시 이런 대면성을 기조로 하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념과 주제와 이념을 내세우기보다 다각적 충돌을 전제로 한 빗겨나기 혹은 엇갈리기, 분절이 이 전시 <너에게 바투 서서>의 얼굴이다. 이질적 분절의 합치야말로 때로 유효한 삶의 표정이 아닌가. 삼인칭의 세계가 이인칭으로 변신하는 순간, 타자가 비로소 자아로 비쳐지는 것, 자아를 타자로 분절하는 것이 이 전시의 독특함이다.
특히 설치는 그 비규정적 장소성 때문에 끝없이 삼인칭 타자인 채로 남는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바투 설 때, 그가 내게 바투 설 때 비로소 이인칭 너, 타자이면서 자아인 작품/전시가 존재하게 된다.
이런 대립의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다양성, 다의성, 다중적 접근을 적절하게 미래지향적으로 전환하는 시각이 아닌가. 현상의 제시보다 현상을 판단하고 그 미래를 함께 보아내는 현재야말로 지향으로서 타자를 보는 것이고 작품을 하는 것이자, 타자를 자신으로 내재화하는 것이고 이 전시의 다각성에 대한 정당성이 아닐까 한다. 이 점이 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평가일 것이다.




전시기간 | 2008-01-11 ~ 2008-04-27 |
장소 | 시안미술관 전관 |
주최 | 시안미술관 |
주관 | 시안미술관 |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상북도, 영천시, 한국박물관협회, 한국사립미술관협회 |
작가 | 노상동, 배동환, 안종대, 안종연, 이이남, 이헌정 |
담당 | 김현민 |
너에게 바투 서서 - Close To You
너에게 바투 서서
강선학 (미술평론가)
작품은 작가의 얼굴이라고 한다. 작품이 작가를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은 작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타자로 작가와 마주 서 있는 존재 아닌가. 그러면 전시는 작품의 얼굴일까, 몸일까, 아니면 작가의 얼굴이거나 몸일까.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세계와 양식적 특징을 가진 작가들이 모여 한 전시를 이루는 이 전시는 어떤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한 개념에 줄서기를 한 듯 한 전시에서는 방정한 명료함이 있지만 언제나 기획자의 보이지 않는 입김 혹은 시선이 부담스럽다. 때로는 작가의 얼굴보다 기획자의 얼굴이 먼저 나선다. 그렇다고 개념 없는 작가들의 집합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전문기획자의 얼굴을 피하려는 이들 의도는 새로운 전시 형태를 선택 했지만 낡은 외투 속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할 문제들의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나 아닌 다른 것들, 이 세상 모두는 삼인칭이다. 그런데 너는 삼인칭이 아니고 이인칭이다. 삼인칭의 영역에서 좀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와 구체화된 대상. 피할 수 없이 당면한 만남이 타자인 바로 너이다. 나는 때로 이인칭의 필연성이 있다면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고 자문한다. 작가에게서 작품과 전시는 이인칭의 밀착된 타자이다.
삼인칭의 그 막연함에서 이제 내 앞에 실재하는 것으로 다가서 있는 세계, 삼인칭이 아니라 이인칭이 된 삼인칭이다. 비로소 내 시선과 호흡으로 다가선 타자이다. 결코 나일 수 없지만 너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부재의 내가 이인칭 너인 것이다.
내 앞에 바투 선 타자, 너에게 바투 서서 나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내 호흡에 따라 변하는 네 모습은 나일까 너일까. 아니,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나이며 너이다. 나에게 바투 선 세계를 통해 비로소 나는 나임을 알 수 있고, 타자로서 나를 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 지금이라는 현재형으로 언제나 바투 서 있는 것이야말로 작품이자 전시이다.
작품이란 언제나 전시라는 형태로 드러나고 전시는 언제나 현재 여기에서 보여지고 존재한다는 면에서 작가자신이자 타자인 셈이다. 전시는 지금 여기서 작품을 묻는 타자의 시선이다. "현재는 존재의 이해가 열리는, 모든 존재 사태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시간성을 가리킨다. 하나의 존재자가 존재하기 시작하고, 존재자의 존재가 현존의 지평 위에서 사유되는 것은 현재를 통해서, 즉 현재에서부터이다.“ 작품에 다가서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가서는 짓이다. 자신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미는 짓이며, 그 얼굴을 들이다보는 짓이다. 그러나 "얼굴은 동일자로 축소될 수 없는 타자가 드러나는 모습”임도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전시로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이 이 전시의 당위성에 대한 답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얼굴은 모든 질문에 선행하는 질문이전의 질문이다."라고 했듯이 나와 타자, 작품과 전시는 질문으로서 여기 있다.
타자에게 다가서서 그 타자가 내 자신일 때, 그 대립의 순간이야말로 일치의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자아의 명료화이자 타자의 명료화가 아닌가. 세계라는 다의성에 발을 딛는 순간인 것이다.
"촌각의 삶 속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이 천의 얼굴을 가진 괴이한 시간의 신비"야말로 타자의 얼굴이자 자아의 얼굴이 아닌가. 나이면서 나 아닌 것들의 대면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하나의 전시 역시 이런 대면성을 기조로 하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념과 주제와 이념을 내세우기보다 다각적 충돌을 전제로 한 빗겨나기 혹은 엇갈리기, 분절이 이 전시 <너에게 바투 서서>의 얼굴이다. 이질적 분절의 합치야말로 때로 유효한 삶의 표정이 아닌가. 삼인칭의 세계가 이인칭으로 변신하는 순간, 타자가 비로소 자아로 비쳐지는 것, 자아를 타자로 분절하는 것이 이 전시의 독특함이다.
특히 설치는 그 비규정적 장소성 때문에 끝없이 삼인칭 타자인 채로 남는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바투 설 때, 그가 내게 바투 설 때 비로소 이인칭 너, 타자이면서 자아인 작품/전시가 존재하게 된다.
이런 대립의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다양성, 다의성, 다중적 접근을 적절하게 미래지향적으로 전환하는 시각이 아닌가. 현상의 제시보다 현상을 판단하고 그 미래를 함께 보아내는 현재야말로 지향으로서 타자를 보는 것이고 작품을 하는 것이자, 타자를 자신으로 내재화하는 것이고 이 전시의 다각성에 대한 정당성이 아닐까 한다. 이 점이 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평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