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0-04-10 ~ 2010-07-11 |
장소 | 시안미술관 본관 |
주최 | 시안미술관 |
주관 | 시안미술관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작가 | 김봉태, 김해성, 한운성 |
담당 | 김현민 |
기억 없는 곳에 거주하기 - 거주를 거부하는 사유들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된 대상이라도 그것이 실재일 수 없는 것이 그림이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실재하는 것의 실재성을 지각하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되었거나 처음부터 실재일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실재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봉태, 김해성, 한운성의 작품은 이런 의문을 절박하게 던져준다. 이 의문으로부터 이 전시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명쾌한 답보다 질문을 더 보탤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기억을 거부하고, 그들 자신 역시 어디에도 거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화면 위에 묘사되는 순간, 대상은 그 실재성을 잃고 그리는 자의 주관적 감성의 하나인 다른 의미로 전변되고 만다. 그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잠재된 것이나 시각화되지 못한 것들 일 수 있다. 혹 그리는 자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감성에 감응된 어떤 것을 자각 없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서로 자신을 보이거나 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경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학습된, 혹은 경험으로 덮인 것들, 타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그림그리기도 일종의 그림보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한다. 진부하고 답 없는 질문이지만 언제나 우리를 놓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림에 대한 적당하고 알만한 답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언제나 그 답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은 대상을 그리고도 대상을 나타내지 못하거나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다를 바 없다. 때로 그런 질문에 우리는 그리는 과정이란 완성으로 향한 것이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한 여행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만, 드러내기보다 도리어 숨겨지는, 혹은 잠재된 것들이 잠시 생성의 과정으로 움직여가는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한다.
김봉태, 김해성, 한운성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그러나 이들 이질적 작가들의 작업에서 하나의 질문을 목격한다. 그림은 건국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벗어나거나, 대상을 해체하거나, 대상의 잠재태를 그려 보일 뿐, 어떤 것도 완결된 형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완성된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림은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의 덩어리로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 감각의 덩어리는 나의 감각과 조우할 때 비로소 생성의 이미지를 보일 뿐, 운동의 시간을 가질 뿐, 어떤 기억을 환기하거나 기억을 완성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기억이 없는 거주를 꿈꾼다. 어떤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운동하는 주체, 모나드의 운동을 보인다.
모나드란 실체적 개념이다. 실체란 "그 자신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자체로써)사고되는 것, 다시 말해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 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작품의 지향은 다른 어떤 것의 개념이 필요치 않는, 대상이나 개념 모두에서 외적 필요 없이 그 스스로 사고되는 것으로 작품이다. 한운성이 과일을 묘사하면서 과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나, 김봉태가 사각상자의 형태와 개념과 무관한 형상을 전개하는 것이나, 김해성이 자신의 질료 내에서, 자신의 형상들의 해체와 결합을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것들로 형상들을 이끌어가듯, 이들 작품들은 스스로 사고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전시기간 | 2010-04-10 ~ 2010-07-11 |
장소 | 시안미술관 본관 |
주최 | 시안미술관 |
주관 | 시안미술관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작가 | 김봉태, 김해성, 한운성 |
담당 | 김현민 |
기억 없는 곳에 거주하기 - 거주를 거부하는 사유들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된 대상이라도 그것이 실재일 수 없는 것이 그림이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실재하는 것의 실재성을 지각하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되었거나 처음부터 실재일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실재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봉태, 김해성, 한운성의 작품은 이런 의문을 절박하게 던져준다. 이 의문으로부터 이 전시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명쾌한 답보다 질문을 더 보탤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기억을 거부하고, 그들 자신 역시 어디에도 거주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화면 위에 묘사되는 순간, 대상은 그 실재성을 잃고 그리는 자의 주관적 감성의 하나인 다른 의미로 전변되고 만다. 그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잠재된 것이나 시각화되지 못한 것들 일 수 있다. 혹 그리는 자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감성에 감응된 어떤 것을 자각 없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서로 자신을 보이거나 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경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학습된, 혹은 경험으로 덮인 것들, 타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그림그리기도 일종의 그림보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한다. 진부하고 답 없는 질문이지만 언제나 우리를 놓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림에 대한 적당하고 알만한 답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언제나 그 답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은 대상을 그리고도 대상을 나타내지 못하거나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아쉬움과 다를 바 없다. 때로 그런 질문에 우리는 그리는 과정이란 완성으로 향한 것이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한 여행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만, 드러내기보다 도리어 숨겨지는, 혹은 잠재된 것들이 잠시 생성의 과정으로 움직여가는 그런 것들이 아닌가 한다.
김봉태, 김해성, 한운성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그러나 이들 이질적 작가들의 작업에서 하나의 질문을 목격한다. 그림은 건국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벗어나거나, 대상을 해체하거나, 대상의 잠재태를 그려 보일 뿐, 어떤 것도 완결된 형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완성된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림은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의 덩어리로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 감각의 덩어리는 나의 감각과 조우할 때 비로소 생성의 이미지를 보일 뿐, 운동의 시간을 가질 뿐, 어떤 기억을 환기하거나 기억을 완성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기억이 없는 거주를 꿈꾼다. 어떤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운동하는 주체, 모나드의 운동을 보인다.
모나드란 실체적 개념이다. 실체란 "그 자신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자체로써)사고되는 것, 다시 말해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 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작품의 지향은 다른 어떤 것의 개념이 필요치 않는, 대상이나 개념 모두에서 외적 필요 없이 그 스스로 사고되는 것으로 작품이다. 한운성이 과일을 묘사하면서 과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나, 김봉태가 사각상자의 형태와 개념과 무관한 형상을 전개하는 것이나, 김해성이 자신의 질료 내에서, 자신의 형상들의 해체와 결합을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것들로 형상들을 이끌어가듯, 이들 작품들은 스스로 사고하는 세계를 보여준다.